주보 성인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인명     안토니오 (Anthony 영어식)

축일     6월 13일

어원     안토니오는 희랍어로 '대면하다'라는 뜻

신분     사제학자, 교회학자, 설교가

활동지역     파도바 (Padova)

활동연도     1195 ~ 1231


호칭     복음적 박사 (교황 비오 12세)

신약성서의 방주 (교황 그레고리오 9세)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가난한 사람들과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수호 성인 

오른손 - 십자가 / 왼손 - 성서 / 성서위 - 아기 예수님이 서 계심 / 복장 - 작은 형제회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르투갈 리스본(Lisbon)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페르난도(Fernandus)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성 안토니우스(Antonius, 또는 안토니오)는 포르투갈 국왕 알폰소 2세의 궁중기사의 아들이었다. 


토니우스는 신앙심 깊은 부모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고, 리스본 주교좌성당 부속학교에서 교육을 받다가 15세 되는 해에 집 근처에 있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1212년에는 자신을 찾아오는 친구와 친척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코임브라(Coimbra)에 있는 성 십자가 참사 수도회로 옮겨 8년 동안 공부와 기도 생활에 전념하였다. 그 후 1219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1220년 1월 16일 모르코에서 순교한 다섯 명의 작은 형제회 순교자들의 유해가 성 십자가 성당으로 옮겨져 왔는데, 이때 자신도 순교자가 되겠다는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그 해 코임브라의 작은 형제회로 옮겨 안토니우스라는 수도명을 받고 곧바로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원하였다. 그의 소망대로 무어인들에게 설교하기 위하여 모르코로 파견되었으나, 도착 직후 병으로 인하여 되돌아와야만 했다


 후 1221년의 아시시(Assisi)의 포르치운쿨라(Portiuncula)에서 개최된 작은 형제회 총회에 참석했다가 코임브라에서 조용히 은둔하며 고행 생활을 하던 그는 포를리(Forli) 근처의 몬테파올로(Montepaolo) 운둔소로 가게 되었다. 어느 날 코임브라 관구장인 그란치아노(Granziano) 신부와 함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하기 위해 포를리로 갔는데, 마침 미사에서 강론할 마땅한 사람이 없어 안토니우스가 맡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그는 설교가로서의 큰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래서 그는 가타리파가 성행하던 북부 이탈리아 지방과 알비파(Albigenses)가 성행하던 남부 프랑스에서 설교하라는 명을 받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해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뛰어난 설교와 화술은 불같았고, 설득력이 있었으며 모여든 군중들을 매료시켰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군중들은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그는 프란치스코회의 첫 번째 신학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설교직에 더욱 헌신하기 위하여 공식적인 직책에서 면제해 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람들을 개종시키고 고해성사를 주는 신부로서의 그의 성공은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중 1226년 10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사망하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에밀리아(Emilia) 관구의 관구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나, 설교에 전념하기 위해 1230년에 사임한 뒤 파도바 수도원에 정착하면서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파도바 전체를 완전히 개종시킨 그의 설교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또한 그는 채무자, 옥에 갇힌 사람들을 석방하는 일을 비롯하여 가난한 이들을 돕고 이단자를 개종시키는 등 끊임없이 활동하였다.

1231년 그는 수종 등을 겸한 열병으로 잠시 요양할 목적으로 캄포 산 피에로(Campo San Piero)로 갔으나, 병이 심해져 파도바로 되돌아오는 길에 베로나(Verona)의 아르첼라(Arcella)에 있는 클라라 수녀회에서 운명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6세였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성당에 모셔져 있다. 그는 이례적으로 바로 다음 해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비오 12세(Pius XII)로부터 교회학자, 복음적인 박사로 선언되었다.


토니우스의 수많은 기적 이야기와 설교 능력은 가톨릭 교회의 전설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그를 능가할 만한 설교가가 나오기는 힘들 정도로 높이 평가해왔다. 그 당시 사람들은 안토니우스를 일컬어 ‘이단자들을 부수는 망치’, ‘살아있는 계약의 궤’라고 하였으며, 기적을 행하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 안토니우스 성인에게 기도하면 곧바로 찾는다는 전설이 생겼다. 이는 어느 수련자가 허락없이 성인의 시편집을 가져갔다가 성인이 발현하여 돌려달라고 해서 그 시편집을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하였다.

가난한 이들의 수호성인으로서 일생 그들을 위해 헌신했던 성인의 이름을 따서 19세기에 '안토니우스 성인의 빵'이라는 구호단체가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를 그림으로 그릴 때에는 팔에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그 이유는 한 방문자가 안토니우스 성인이 탈혼 중에 일어난 이 일을 기록했다는 이야기 때문이다.

성 안토니오께 드리는 13일 기도

오! 영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죽은 자를 부활케 하는 능력을 천주께 받으셨으니 내 영혼을 깨어주사 열심하고 거룩한 생활에로 부활하게 하소서.

오! 지혜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성 교회의 참 빛이시며, 천상 진리의 빛으로 내 영혼을 비추소서.


오! 자비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고통 중에 당신께 달아드는 자를 도우심에 항상 바르시고 능하시니 내 영혼을 현재의 비애에서 구하소서.

오! 능력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어려서부터 지옥의 원수 이기기를 배우셨으니 내 영혼을 원수의 공격에서 막아주시고 혹심한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오! 지극히 정결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비할 데 없는 순결의 백합이시니, 불결의 지겨운 모병에 내 영혼을 한번도 더럽히지 말게 하소서.

오! 사랑하올 천상 의사이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병자들이 당신의 전달로 건강을 회복하오니, 죄로 상처받은 내 영혼을 고쳐주시고 악한 경향을 바르게 하소서.

오! 지극히 충실하신 성 안토니오여, 풍랑 거치른 인생 행로에 내 영혼을 지배하사 영원한 구원의 포구까지 인도하소서.

오! 자애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당신은 인간 재판에서 유죄 언도 받은 자들의 구속자이시니, 죄의 올가미에서 내 영혼을 해방시켜주사 떨리는 천주의 심판 받을 무리 중에 들지 말게 하소서.

오! 참으로 기이하신 성인이시여, 몸에서 떨어졌던 지체들도 당신 전달로 다시 결합되어 생명을 얻은지라, 불신과 악습 때문에 떨어져나가 지체들도 다시 성 교회에 결합시켜주소서.

10 오! 지극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당신은 잃어버린 물건을 잘 찾아주시오니 고마우신 안토니오여, 나로 하여금 성총과 천주 사랑을 죄로 잃지 말게 하시고 만일 불행히 잃는다면 즉시 찾아주시어 다시는 잃지 말게 사소서.

11 오! 사랑 지극하신 성인이시여, 젊은이도 늙은이도 당신께 달아들면 들어 허락함을 받나이다. 불쌍하고 가련한 나도 당신께 달아드오니 당신 사랑을 감하지 말으시고 나를 또한 들어 허락하소서.

12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무수한 위험이 내 영혼을 둘러 샀으니, 나를 해방시키시고 구원하소서.

13 오! 사랑 지극하신 성 안토니오여, 파도바의 당신 무덤 속에서 내게 요긴한 사정들을 굽어보시고, 당신 기묘하온 혀로써 천주께 말씀드리사 마침내 위로받고 들어 허락함을 받게하소서. 빌지어다, 오! 주여 당신께 달아드오니, 안토니오 성인을 공경함으로써 우리 안에 평화가 충만하고 영신이 굳세어지고 영복을 받는데 도움을 얻게 하소서.

연보

 1188 - 1195

포르투갈의 수도 리수본에서 출생, 세례명은 페르디난도


 1207 - 1208

아우구수티노회 대성당 부속학교 입학


 1209 - 1210

코임브라의 아우구스티노회 성 십자가 수도원 입회


 1218 - 1220

사제서품


 1220

포루타갈 왕 돈 베드로가 아프리카 모로코에서 순교한 프란치스코회 수사 다섯 분의 유해를 모셔왔을 때 페르디나도는 열광적으로 환영하였고, 이를 계기로 프란치스코회에 입회, 수도명으로 안토니오를 받음


 1221

돗자리 총회 참석하여 프란치스코 성인을 만남


 1221 - 1222

몬테파올로 (포를리)에서 생활


 1222

포를리 서품식에서 설교


 1222 - 1224

이탈리아에서 설교


 1223

프란치스코에 의해 신학강사로 임명


 1225 - 1227

프랑스에서 설교


 1226

아를레스 수도회의 중 설교할 때 살아있는 프란치스코가 발현


 1227 - 1229

“주일강론집”(Sermones dominicales) 저술


 1227 - 1230

로마, 롬바르디아, 마르카 관구의 관구장이 됨


 1227 - 1231

북부 이탈리아에서 설교 파도바에 거주


 1230

포수도회 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원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알현함


 1230 - 1231

“축일강론집”(Sermones festivi) 저술


 1231

사순절 기간 동안 파도바에서 설교 
5월에 성 보니파시오성의 백작 리차르도의 석방을 위해 베로나에 있는 폭군 로마노의 에젤리노에게로 감. 그 이후로 캄포잠피에로에 거주
6월 13일 마르첼라에서 선종, 성모 마리아 성당에 묻힘


 1232년 5월 30일

스플레토 대성당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서 성인품에 오름


  1263년 4월 8일

성인의 유해가 보나벤트라에 의해 세밀히 조사됨


  1350년 2월 15일

볼로냐의 귀도 추기경에 의해 다시 세밀히 조사됨. 선인의 턱을 성골상자에 모심


  1946년 1월 16일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박사" (Dottore della chiesa) 칭호를 받음


  1981년 1월 16일

베드로 팔라치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교황청위원회가 성인의 무덤을 열고 유해를 세밀히 조사함

    참고 문헌


  • 김정진 편역, 가톨릭 성인전 (하)  -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서울(가톨릭출판사), 2004년, 118p ~ 120p
  • 스테파노 델오르토 저, 강선남 역,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서울(바오로딸), 2003년
  • 페르디난트 홀뵉 저, 이숙희 역, 성체의 삶을 위한 성체와 성인들 - '파두아의 안토니오 성인', 서울(성요셉출판사), 2000년, 95p ~ 99p
  • 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가톨릭대사전 제8권 - '안토니오, 파도바의', 서울(한국교회사연구소), 2001년, 5836p ~ 5839p
  • 황정윤 저, 이승문 그림, 성 안또니오, 서울(성황석두루가서원), 1990년
  •  L. 폴리 저, 이성배 역, 매일의 성인, '파도바의 성안토니오 사제 학자', 서울(성바오로), 2002년, 141p ~ 14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