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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가라지의 비유

박용화
2019-08-06
조회수 1358

가라지의 비유

(소제목 : 하느님 나라) 마태오 13,24-30

자기 자신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을 탓하는 자칭 진실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어느 자매님의 이야기입니다. 이 자매는 태중 교우로서 온 집안 가족들이 가톨릭 신자이며, 자매형제들의 몇 분은 수도자인 수녀로 삶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의탁하고 바치고 있는 아주 훌륭한 집안에서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신앙적으로는 삶 자체가 신앙생활이어서 시선을 다른 곳에 둘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늦게 신앙인이 된 남편과 의견 충돌로 대화를 단절하기까지 하기에 이르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별안간 아무개를 지목하면서 비난을 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남편이 듣기에는 별 대단한 비난거리도 아닌데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하는데 여기에서 남편의 분노를 샀던 것입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그토록 오랜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왔으며,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왔다고 자부할 정도의 그녀로서는 있을 수 없는 옹졸하고 이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언행을 자행한 것에는 아연 실색하고도 남음이 있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역시 인간의 지혜의 능력은 하느님의 그것에 비해서 너무나도 미미하고 환경의 변화에 따라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표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라지의 비유를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는 남보다 더 우월하고 싶은 욕심에서 밀보다 가라지가 더 잘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가라지도 그렇지만, 특히 남의 가라지가 더 잘 보이는 것이 생존 경쟁이 극심한 현실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의 그 가라지를 뽑아버리려고 남을 비방하고 매도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기를 씁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부질없는 짓이며 오히려 스스로 하느님에게 죄를 짓는 결과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압니다. 왜냐하면 ‘가라지의 비유’ 말씀에 의하면 가라지를 뽑아 버릴 수 있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곧 추수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라지만을 단으로 묶어서 불에 태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 줄 알면서 짓는 죄의 대가는 지옥 불 뿐이지만, 하느님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마치 밀 사이에 가라지가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추수 때까지 우리들의 죄를 보시고도 기다려 주십니다. 이 얼마나 극진한 사랑의 놀라움입니까? 죄인 줄 모르고서 지은 죄보다 양심과 이성에 비추어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짓는 죄가 더 아프고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됩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 안에 있는 가라지를 볼 때 밀과 가라지를 함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할 줄 아는 마음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불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께서는 침묵만을 하고 계시는데 대하여 무능하신 하느님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해도 우리로 하여금 회개할 기회를 주시며, 악의 세상이라고 해도 선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이유는 가라지 같이 악한 삶을 살았다 해도 언젠가는 밀과 같이 선한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자기 편의대로 하느님께서 똑같이 사랑하시는 다른 사람들을 감히 단죄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시키신 일에 대해서 말없이 행할 때, 분명히 선물이 우리에게 돌아옵니다. 하지만 우리의 뜻대로 판단하고, 우리 뜻대로 행동한다면 분명히 후회할 일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친절하게도 별난 것을 다 염두에 두시고 우리에게 당신만을 드러내셨습니다. 인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유일한 길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온전히 설 수 있는 자 되게 하셨습니다. 또 하느님이 주신 지혜를 사용하므로 써 자비하심과 관용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새롭게 이해하고 믿고 사랑하면서 산다면 그분이 부르시는 날 우리는 하느님 나라에 가서 그분을 뵙는 은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005.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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